외국인 임금근로자 절반 월 200만~300만원 번다···이직 희망이유 1위는 ‘낮은 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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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4-19 20:39 조회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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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임금근로자 2명 중 1명은 한 달에 200만원에서 300만원 사이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조사됐다. 10명 중 6명은 현재 직장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임금에 대한 불만 또는 위험도 등의 이유로 이직을 희망하는 외국인 근로자도 10명 중 1명 꼴로 있었다.
통계청은 17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이민자체류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 : 체류자격별 외국인의 한국 생활’을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12월 내놓은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를 체류 자격별로 세분화한 것이다.
조사 내용을 보면 외국인 임금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200만~300만원 미만’이 50.6%로 가장 많았다. 300만원 이상을 받는다는 응답은 35.8%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이어 ‘100만~200만원’(9.9%), ‘100만원 미만’(3.7%) 순이었다.
‘200만~300만원 미만’ 비중은 비전문취업(66.5%), 전문인력(53.9%), 방문취업(51.5%), 결혼이민(45.4%), 재외동포(44.3%) 등에서 높았다. 300만원 이상의 임금을 받는 외국인의 체류자격별 현황은 영주권자(51.8%), 재외동포(43.0%), 전문인력(43.0%) 등으로 집계됐다.
외국인 임금근로자들은 근로시간과 임금·보수에서 각각 56.7%, 55.2%의 만족도를 보였다. 우리나라 직장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62.6%였다.
외국인 근로자의 12.3%는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희망했는데, 이직희망 사유로는 ‘임금이 낮아서’(39.2%)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일이 힘들거나 위험해서’(19.4%)를 꼽은 응답자가 두 번째로 많았다.
지난 1년간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한 외국인은 유학생(21.5%), 방문취업(16.3%), 재외동포(14.8%), 영주(13.6%) 등 전체 외국인 대비 13.5%로 나타났다.
경제적 어려움 유형(복수응답)으로는 ‘병원비가 부담돼 진료를 받지 못했다’는 응답이 35%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공과금을 기한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내에 납부하지 못했다’(27.3%), ‘본인 또는 가족의 학비 마련이 어려웠다’(22%) 순이었다.
남민전 사건 연루, 프랑스로 망명1995년 자전적 에세이로 큰 반향1999년 유홍준 교수 권유로 귀국
언론인·정당인 등 다양한 활동마지막까지 소외된 이들 위한 삶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한국에 잘 알려진 대중작가이자 지식인,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18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유족들에 따르면 그는 이날 낮 12시쯤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난해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1947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경기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자퇴하고,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인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됐다가, 복학해 8년 만인 1977년에 졸업했다.
서울대 졸업 후 무역회사 대봉산업에 재직하던 중인 1979년 홍세화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파리 지사에 근무하던 그는 귀국길이 막혔고 프랑스에 망명 신청을 했다. 이후 택시운전 등을 하며 파리에 정착해 20년을 지냈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망명 시절이던 1995년 자전적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를 출간하면서다. 그는 파리생활을 하며 배운 것들을 토대로 한국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 특히 그가 책을 통해 제시했던 ‘톨레랑스’(프랑스어로 관용을 뜻함)라는 개념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톨레랑스’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던 당시 한국 사회에 지적 변화와 성찰을 촉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책은 국내 출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9년에 출간한 문화비평 에세이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대학 시절 연극반 친구이던 유홍준 교수와 임진택 연출가의 권유로 망명생활 20년 만인 199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김지하 등 문인을 비롯해 리영희 교수, 김근태 의원 등 각계 인사로 구성된 ‘홍세화 귀국추진모임’이 결성됐고 2002년에야 영구 귀국했다.
귀국한 뒤 한겨레신문사에서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2011년에는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의 초대 한국판 편집인을 지냈다.
그는 언론인, 정당인, 사회운동가의 자리를 오가며 한국 사회 진보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진보정치가 흔들리던 시기인 2012년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신당이 노동당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노동당 고문을 지냈다. 2013년에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계간지 ‘말과 활’ 창간호를 내고 발행인을 맡았다.
2015년부터는 장발장 은행장이라는 직함을 새로이 달았다.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벌금을 낼 형편이 못 돼 교도소에서 노역을 하는 소년소녀 가장, 미성년자, 차상위 계층 등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장발장 은행을 설립하고 최근까지 소외된 이들의 삶을 살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일선씨와 자녀 수현·용빈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다.
통계청은 17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이민자체류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 : 체류자격별 외국인의 한국 생활’을 발표했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12월 내놓은 ‘이민자 체류실태 및 고용조사’ 결과를 체류 자격별로 세분화한 것이다.
조사 내용을 보면 외국인 임금근로자의 임금 수준은 ‘200만~300만원 미만’이 50.6%로 가장 많았다. 300만원 이상을 받는다는 응답은 35.8%로 두 번째로 많았다. 이어 ‘100만~200만원’(9.9%), ‘100만원 미만’(3.7%) 순이었다.
‘200만~300만원 미만’ 비중은 비전문취업(66.5%), 전문인력(53.9%), 방문취업(51.5%), 결혼이민(45.4%), 재외동포(44.3%) 등에서 높았다. 300만원 이상의 임금을 받는 외국인의 체류자격별 현황은 영주권자(51.8%), 재외동포(43.0%), 전문인력(43.0%) 등으로 집계됐다.
외국인 임금근로자들은 근로시간과 임금·보수에서 각각 56.7%, 55.2%의 만족도를 보였다. 우리나라 직장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62.6%였다.
외국인 근로자의 12.3%는 다른 직장으로 이직을 희망했는데, 이직희망 사유로는 ‘임금이 낮아서’(39.2%)를 가장 많이 꼽았다. 이어 ‘일이 힘들거나 위험해서’(19.4%)를 꼽은 응답자가 두 번째로 많았다.
지난 1년간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한 외국인은 유학생(21.5%), 방문취업(16.3%), 재외동포(14.8%), 영주(13.6%) 등 전체 외국인 대비 13.5%로 나타났다.
경제적 어려움 유형(복수응답)으로는 ‘병원비가 부담돼 진료를 받지 못했다’는 응답이 35%로 가장 많았다. 이어 ‘공과금을 기한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내에 납부하지 못했다’(27.3%), ‘본인 또는 가족의 학비 마련이 어려웠다’(22%) 순이었다.
남민전 사건 연루, 프랑스로 망명1995년 자전적 에세이로 큰 반향1999년 유홍준 교수 권유로 귀국
언론인·정당인 등 다양한 활동마지막까지 소외된 이들 위한 삶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로 한국에 잘 알려진 대중작가이자 지식인, 사회운동가인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이 18일 별세했다. 향년 77세.
유족들에 따르면 그는 이날 낮 12시쯤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난해 2월 전립선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 왔다.
1947년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경기고를 거쳐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들어갔다. 이듬해 자퇴하고,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 시절인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됐다가, 복학해 8년 만인 1977년에 졸업했다.
서울대 졸업 후 무역회사 대봉산업에 재직하던 중인 1979년 홍세화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파리 지사에 근무하던 그는 귀국길이 막혔고 프랑스에 망명 신청을 했다. 이후 택시운전 등을 하며 파리에 정착해 20년을 지냈다.
그의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망명 시절이던 1995년 자전적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를 출간하면서다. 그는 파리생활을 하며 배운 것들을 토대로 한국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 특히 그가 책을 통해 제시했던 ‘톨레랑스’(프랑스어로 관용을 뜻함)라는 개념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톨레랑스’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던 당시 한국 사회에 지적 변화와 성찰을 촉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책은 국내 출판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9년에 출간한 문화비평 에세이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는 대학 시절 연극반 친구이던 유홍준 교수와 임진택 연출가의 권유로 망명생활 20년 만인 1999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이후 백낙청, 신경림, 황석영, 김지하 등 문인을 비롯해 리영희 교수, 김근태 의원 등 각계 인사로 구성된 ‘홍세화 귀국추진모임’이 결성됐고 2002년에야 영구 귀국했다.
귀국한 뒤 한겨레신문사에서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2011년에는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디플로마티크의 초대 한국판 편집인을 지냈다.
그는 언론인, 정당인, 사회운동가의 자리를 오가며 한국 사회 진보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진보정치가 흔들리던 시기인 2012년 진보신당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신당이 노동당으로 이어지면서 그는 노동당 고문을 지냈다. 2013년에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계간지 ‘말과 활’ 창간호를 내고 발행인을 맡았다.
2015년부터는 장발장 은행장이라는 직함을 새로이 달았다.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벌금을 낼 형편이 못 돼 교도소에서 노역을 하는 소년소녀 가장, 미성년자, 차상위 계층 등에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장발장 은행을 설립하고 최근까지 소외된 이들의 삶을 살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일선씨와 자녀 수현·용빈씨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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