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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최종 후보 오른 황석영 “이번에 받고 노벨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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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4-19 16:15 조회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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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받고 (차기작)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할매’로 노벨상을 한 번 더 받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황석영 작가(81)는 17일 서울 서교동 창비 50주년홀에서 열린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 선정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창비)가 최종후보에 오른 소감을 밝히며 이같이 말했다. 1998년 이후 10여 차례 국제 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거 같은데, 내 타이밍은 끝난 줄 알았어요. 요새 평균수명이 늘어서 타이밍이 좀 연장된 거 아닌가 싶은데, 누군가가 욕망에 서슴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전에는 그런 생각을 안 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철도원 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한반도의 역사를 관통하는 작품으로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오늘날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이백만의 증손이자 공장 노동자 이진오의 이야기가 큰 축을 이루고 있다. 황석영 작가는 영등포에서 지냈던 유년시절을 다뤘기 때문에 오래만에 신나게 썼던 작품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옛날 같으면 장길산 정도의 기준(분량)은 써야 기본적인 서사가 나올텐데…(못썼다)라며 아쉬워했다. 만약 주인공이 만주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썼다면 최소한 5권짜리 소설이 됐을 거다. 그럼 큰일 난다.(웃음)
후속작 계획도 밝혔다. 준비 중인 작품은 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고 마을 빈터에 남은 600년 된 나무 이야기로, 제목은 ‘할매’로 정했다. 올해 가을까지는 여기에 전념할 생각이다. 다음 작품으로는 홍범도 장군의 말년과 ‘연변 15만원 탈취 사건’을 엮은 이야기를 집필할 계획이다. 문성근 배우가 술자리에 5촌 당숙의 것이라며 노트 한 권을 들고 나온 것이 모티브가 됐다. 황 작가에 따르면 노트의 주인공은 1920년 연변 청년들이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5만원을 탈취한 ‘간도 15만원 탈취 사건’의 당사자다. 황 작가는 시간차가 있지만 홍범도 장군의 말년과 지금 막 사건을 저지른 20대 초반 청년의 3년간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써 보려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작품으로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도망을 다녔던 35년 동안의 이야기를 계획하고 있다.
황 작가는 훗날 자신이 근대의 극복과 수용을 자기의 일감이나 사명으로 생각하고 이야기하다 죽은 사람으로 규정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세계가 근대를 극복하지 못했는데, 동아시아는 더합니다. 일본은 근대를 극복했다고 하면서도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고 중국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인 근대적 사회실험을 지금도 하고 있죠. 한국은 근대적 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분단체제고요. 동아시아 전체가 그러한데 나도 결국 근대를 극복하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론기관의 역사를 말한다면 서양보다 한국이나 중국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훨씬 앞선다. 서양에서는 17, 18세기 신흥 시민계급과 함께 언론기관이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이미 고려 시대에 정부 조직 안에 언론기관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고려 시대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언론 기능을 발전시켰다.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민간에서든 정부 안에서든 권력과 국정을 감시하는 언론이 필요했다.
오늘날 언론사 기자의 일을 맡은 조선 시대 정부 기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춘추관과 예문관을 들 수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언관(言官)이라 했는데, 국왕과 관리들을 말로 비판하는 일을 했다. 예문관과 춘추관은 임금과 관리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고, 그 기록을 모아 정리했다. 그 결과물이 <조선왕조실록>이다.
예문관과 춘추관은 똑같이 ‘국사(國事)’를 기록하는 일을 했지만 그 구체적 업무와 편제는 달랐다. 가장 큰 특징은 춘추관 관원 모두 다른 관직이 있는 겸직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예문관 관원은 전임이었다. 춘추관 관원이 겸직했던 부서는 승정원, 홍문관, 의정부, 세자시강원, 사헌부, 사간원, 승문원, 종부시, 육조였다. 다시 말하면 이들 부서 관리들 중 한 명 이상은 춘추관 관직을 겸직했다. 춘추관은 그 규모도 예문관보다 컸다.
조선왕조가 국정 기록을 모으고 ‘국사(國史)’를 쓰기 위해 춘추관과 예문관의 이중구조를 유지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춘추관 관원이 겸직하는 부서에 그 힌트가 있다. 의정부, 이·호·예·병·형·공조로 구성된 육조, 승정원,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승문원 등은 조선왕조를 움직이는 정부 핵심 조직이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내용을 충실히 기록하려면 기록자가 그 조직 소속 관리여야 했다. 세자시강원은 세자 교육을 담당한 문신 조직이고 종부시는 왕실 계보인 ‘선원보첩’을 편찬하고, 임금의 친족인 종실(宗室)을 감시하고 그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맡은 기관이다. 말하자면 춘추관은 미래 권력과 왕족의 권력까지 살피고 기록했다.
예문관의 핵심 기능은 정7품 봉교 2인, 정8품 대교 2인, 정9품 검열 4인의 관리가 담당했다. 이들 8인을 ‘한림’이라고 불렀다. 7, 8, 9품 관품으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젊었고 국사 편찬의 핵심 기능을 담당했다. 춘추관원이 작성한 각 부서 운영에 대한 기록을 정리해서 역사기록으로 만든 것도 이들이었다. 이들이야말로 본격적 의미의 사관(史官)이었다. 그리고 이들만 <조선왕조실록>에 인물과 국정 상황에 대해 자기 생각을 기록한 사평(史評)을 남겼다. 춘추관원이 사실을 취합했다면 한림 8인은 그 기록을 맥락에 맞게 편집했고, 거기에 자기 생각을 더했다.
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왕건의 유언과 ‘공심’
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어찌 보면 춘추관은 오늘날 팩 저널리즘(pack journalism)의 한국적 형태인 ‘출입처 기자단’과 흡사했다. 국가를 운영하는 핵심 기관이 정부이므로 정부가 생산한 정보를 모으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정부 정책이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정책은 취지가 아닌 효과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고 정부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생산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 춘추관 외에 예문관이 별도로 존재하고, 이들만 비판적 기록을 남기며 사관이라고 불렸던 이유이다.
근년 치러진 선거는 정당 간 대결이면서 동시에 그와 공조된 미디어 간 대결의 측면도 있어 보인다. 한때 종이신문과 방송 간 힘겨루기가 있었다면 이젠 팟캐스트와 유튜브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크게 보면 미디어마다 정파적 색채가 상이하다. 미디어별로 세대별 경험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세대가 결합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번 선거에서 그 양상이 두드러졌다. 역사는 같은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변천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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