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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안면인식 AI 악용…가자지구 주민 무차별 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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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4-01 09:50 조회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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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지난해 가자지구에서 전쟁이 발발한 후 하마스 관련자를 색출하고 인질을 식별한다는 명분으로 안면 인식 인공지능(AI) 기술까지 도입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광범위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뉴욕타임스(NYT)는 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 정보기관 소식통들의 말을 인용해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곳곳에서 은밀하게 안면 인식 기술을 운용하고 있다고 2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사이버 정보부대 8200을 비롯해 이스라엘군이 민간기업 ‘코사이트’의 안면 인식 기술을 활용해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얼굴을 스캔해 자료를 모으고 신원을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면 정보 수집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어떤 사전 고지나 동의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술은 당초 하마스에 납치된 이스라엘 인질을 찾고 식별한다는 이유로 가자지구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으나, 점차 하마스 관련자 색출과 주민 통제에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다고 소식통들은 전했다. 이들은 가자지구에서 이 프로그램을 운용하기 위해 코사이트 직원들이 투입됐고, 군중들을 촬영한 사진과 드론 영상에서 안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가자지구 배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도 이 기술이 탑재된 카메라가 제공됐다. 피란민들이 가자지구 곳곳에 설치된 이스라엘 군검문소를 지날 때마다 이들의 얼굴을 무작위로 스캔한 뒤 이미 확보한 사진 자료와 대조해 수분 만에 신원을 특정한다는 것이다.
이 사안을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 측 소식통들은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시간과 자원을 오용하고 있다는 우려에서 이 같은 내부 폭로를 하게 됐다고 NYT에 말했다.
앞서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도 안면 인식 AI 기술 ‘블루 울프’를 활용해 통제 지역을 벗어나는 주민을 임의로 색출하고 구금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5월 이 사실을 폭로한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이스라엘이 ‘자동화된 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정책)’를 펼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서안지구와 달리 2005년 이스라엘군이 철수했던 가자지구에서조차 이번 전쟁을 계기로 안면 인식 기술을 활용한 광범위한 주민 통제가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AI를 활용한 불법적인 생체 정보 수집과 감시 체계 구축에 그치지 않는다. 설익은 기술을 전쟁에 사용하면서 민간인을 하마스 조직원으로 오인해 구금하거나 고문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이 기술을 개발한 이스라엘 기업 코사이트는 얼굴의 50% 미만만 카메라에 잡히고 어둠 속이나 낮은 화질에서도 정확한 안면 인식이 가능하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한 이스라엘 정보장교는 촬영된 영상의 화질이 낮거나 얼굴이 가려져 있다면 안면 식별 기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이스라엘군은 수배 중인 하마스 대원의 데이터베이스를 구글의 무료 사진 공유 서비스인 구글포토에 업로드해 활용하고 있다.
NYT는 AI 기술 발전으로 세계 곳곳에서 안면 인식 기술이 활용되고 있으나 중국과 러시아에서는 소수민족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데 악용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에까지 이 기술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짚었다. 마트 마흐무디 국제앰네스티 연구원은 가자지구에서 안면 인식 기술 사용은 ‘인간성의 완전 말살’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 기술의 오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특정인이 무장단체 조직원으로 일단 인식되면 이스라엘군은 기술의 실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 남동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인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4월 전후 이맘때면 가시마을을 관통하는 녹산로 주변은 노란 유채꽃과 벚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봄의 정취 가득한 이 아름다운 마을은 76년 전 ‘제주 4·3사건’(이하 4·3)으로 주민 421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집은 모두 불에 타 폐허가 됐다. 가시마을은 제주시 노형동과 북촌리에 이어 세 번째로 인명피해가 컸다. 다음 달이면 4·3 사건이 발생한지 벌써 76주년이 된다.
가시마을에서 나고 자란 오태경 할아버지(93)는 18살에 4·3을 마주했다. 참혹하지만 선명한 기억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그는 4·3에 대해 들어주는 것이 고맙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가시마을에서는 1948년 5·10선거 당시 마을 투표소를 습격한 무장대에 의해 이장과 학교 교장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단선·단정 반대를 외치는 무장대가 투표소를 습격하는 사건은 제주 곳곳에서 이뤄졌다.
오 할아버지는 무장대 습격 이후부터 마을에 서북청년단이 살다시피하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육지에서 들어온 응원경찰도 가끔씩 와서 난리쳤다. 유독 악한 사람들을 만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탄압이 심했다. 매일 같이 얻어맞고 총질 당하고…. 마을 청년들이 고야동산에서 보초를 서 ‘서청이 온다’ 하면 도망쳐 숨었다가 밤에 돌아왔다고 말했다.
4·3 당시 중산간마을은 산간지대에서 활동하는 무장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군경세력인 토벌대 간 무력 충돌의 무대가 됐다. 특히 토벌대는 무장대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빌미로 1948년 11월 중순부터 약 4개월간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키는 대규모 강경진압작전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하면서 중산간마을은 말 그대로 초토화됐다.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지고 인명피해 역시 남녀노소 구분 없이 극심했다.
오 할아버지는 11월15일 진압군이 마을에 와서 한집 건너 한집 식으로 불을 붙이더라. 그날 하루에만 30여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일주일을 태우니 온 마을이 탔다고 말했다. 마을이 모두 불 타 살 곳이 사라진 가시마을 주민들은 소개령에 따라 표선국민학교과 토산리 절간고구마 창고에 집단 수용되거나 인근 마을 또는 산으로 흩어졌다. 오 할아버지도 부모님과 함께 토산 창고에 수용됐다.
오 할아버지는 12월 어느 참 달 좋은 밤이었는데 군인들이 토산 창고에 있는 사람들에게 향사로 모두 모이라고 했다. 토산리 마을 사람들도 향사로 모였다. 군인들이 가시 사람, 토산 사람 나눠 서라고 한 후 토산 청년 100여명을 포승줄로 줄줄이 묶어 데려가더라. 그 앞에서 달달 떨면서 봤다. 가시리 사람 3명도 끼어 있었는데 모두 표선 모래판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이 때 끌려간 주민들은 12월18~19일 표선 백사장(한모살)에서 총살당했다. 이후에도 표선백사장에서는 도피자 가족, 수용 중이던 소개민에 대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제주4·3추가진상조사보고서는 4·3 당시 표선백사장에서는 가시리, 토산리, 세화리, 성읍리, 수망리 주민 등 234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2월22일에는 표선국민학교에서 수용생활을 하던 가시리 주민 76명이 표선리 버들못에서 집단총살당했다. 경찰이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후 가족 중 한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해 끌고 가 사살했다.
그는 12월 그믐쯤에는 창고에서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길 건너 밭에 대여섯 사람을 세워놓고 총을 겨눈 채 쏘면 박수 치라고 하더라. 엄마 품에서 아이가 기어나오니 아이에게도 총을 쏘았다. 참 기가 막힌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우여곡절 끝에 토산 창고 수용소에 빠져나와 마을로 돌아갔다. 그의 형은 산으로 올라간 후 어디서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행방불명인 상태로 있다. 형수는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말에 산에서 내려왔으나 영문도 모른 채 군법회의에서 1년형을 받고 2살 짜리 아이와 함께 전주형무소에서 징역을 살다왔다.
그는 우리 마을 희생자는 신고 숫자로 421명이지만 가족 모두가 죽어 신고하지 못한 이들까지 합하면 500명이 넘을 것이라면서 마을은 1949년 5월 본동을 중심으로 재건됐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2017년 가시마을 4·3길이 개통하면서부터 현재까지 8년째 ‘4·3길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5월 4·3유족회와 함께 미국을 찾아 4·3 경험을 증언하기도 했다. 내용의 참담함에 통역사와 참석자 모두 오열했다.
그는 4·3희생자유족회, 천주교 제주교구, 세계섬학회, 제주주민자치연대와 함께 미국 백악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미 군정기에 발생한 4·3 양민학살에 대해 미국이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떠올리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난다. 사람 죽이는 것을 개·돼지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여겼다.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제주사람은 총에 맞아 죽어도, 죽도록 맞아도, 어디 가서 굶어 죽어도 하소연할 곳 없었다. 내 갑장 6명도 인천형무소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농촌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죽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 할아버지는 그런 세상이 다시는 오면 안된다는 생각에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4·3을 알리고 있다. 제주의 세가 약해서 그런가. 그 어떤 역사보다 큰 피해와 악행을 당했는데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더라. 하긴 예전에는 함부로 말하지도 못했다. 이제야 자유롭게 말한다. 억울한 4·3이 전국적으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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