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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는 과거를 지우는 말”···구술 아닌 자료로 쌓은 ‘공고한’ 퀴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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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3-30 20:58 조회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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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서울 종로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비온뒤무지개재단 산하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이 진행하는 역사 투어에 참여한 시민들은 1894년부터 1990년까지 한 세기 역사를 15분 만에 훑었다. 1990년대부터는 걸음걸이가 급격히 느려졌다. ‘무지갯빛 이야기꽃’이 피기 시작한 탓이다. 기록상 한국 첫 성소수자 단체인 ‘초동회’ 첫 소식지를 두고는 30분 이상 설명이 이어졌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전시장 기준 약 20m를 이동하는 데는 무려 2시간이 걸렸다. 안내를 맡았던 루인(활동명) 퀴어락 아키비스트(문서 보관 담당자)는 투어를 마치며 한국 근현대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이야기할 때 이제 퀴어는 뗄 수 없다는 인식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퀴어 아카이브(Queer Archive·성 소수자 기록·자료)의 줄임말인 ‘퀴어락(Queerarch)’은 첫 역사 투어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한국 퀴어 역사를 배우다’를 총 3회로 나누어 진행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내 퀴어 전시품과 국립현대미술관 내 이강승 작가의 전시를 연결해 한국 퀴어의 역사를 설명하는 취지로 기획된 행사는 회차별로 시민 7명씩 참여했다. 투어를 기획한 아키비스트 루인씨를 27일 서울 마포구 퀴어락 사무실에서 인터뷰했다.
2009년 설립된 퀴어락은 ‘움직이는 아카이브’를 지향한다. 수집한 자료로 전시를 열기도 하고, 연구자·박물관 등지의 요청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료 수집·보존을 넘어서, 퀴어와 관련한 서적·잡지·문서 등이 얼마나 ‘많은지’ 누구나 볼 수 있게 하려는 목표도 있다. 퀴어락이 개인·단체의 기증과 자체 수집으로 모은 자료는 1만건이 넘는다.
루인 활동가는 퀴어 역사 자료를 아카이브에 모으는 작업을 ‘최초를 지워가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1921년 동아일보는 여자가 변해서 남자가 됐다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은 1955년 8월 15일 적십자병원에 청년 한 명이 입원해 ‘성전환 수술’을 받았는데 한국에서는 처음이라고 보도했다. 1990년 6월 29일에도 성전환 수술을 받았던 무용수 김모씨가 국내 최초로 성전환 수술 후 남성에서 여성으로 인정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루인 활동가는 ‘최초’라는 말은 언제나 옛날의 역사를 지우는 일이고, 퀴어의 존재는 거듭 ‘최초’라는 말로 지워졌다라며 일부 사람들이 ‘최근에 퀴어가 등장했다’고 말할지라도 자료로 남는 아카이브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근거라고 말했다.
흔히 단체가 쪼개지면 내부 갈등이 원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곤 한다. 성소수자 단체 초동회가 분화할 때도 유사한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퀴어락이 확보한 초동회 회의록을 보면 이 단체에서 분화한 게이 단체 ‘친구사이’와 레즈비언 단체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단체를 나누지만 ‘동성애 대표 모임’이라는 연대체를 꾸리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난 23일 퀴어 역사투어에 참여했던 박모씨(32)는 ‘초동회’가 갈라진 이유가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지향이 인스타 팔로우 구매 다르다’였고, 이후 함께 연대하는 관계였다는 게 가장 인상 깊었다며 나는 굳이 따지자면 에이섹슈얼(무성애) 쪽이라 다른 쪽에 무관심한 때도 많았지만, 연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꼈다라고 말했다.
루인 활동가는 20년 전만 해도 퀴어 자료가 ‘얼마나 있겠냐’라는 생각을 했는데, 한국 퀴어 자료는 종류가 다양했고, 양도 많았다라며 앞으로 퀴어의 관점에서 중요한 여러 공간을 엮어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투어도 기획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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