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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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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3-30 10:39 조회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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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 음력 2월13일, 정조의 최측근인 좌의정 채제공이 파직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채제공이었지만, 정조의 결단은 추상같았다.
발단은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능) 별검 이주석에 대한 어사의 보고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과 그의 동료 이주명의 인스타 팔로워 죄는 심각했다. 특히 두드러진 죄는 우금령(牛禁令·소 도축 금지령)을 어긴 일이었다. 조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 도축을 법으로 금했는데, 그에 더해 한 해 전인 1795년에는 이를 강조한 왕명이 별도로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주석은 능졸들이 영릉 내에서 소를 사적으로 도축하는 것을 허락했으니, 문제가 컸다.
게다가 어사의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은 영릉 인근 마을에 사는 과부를 불법으로 결박해서 밤새 숯 보관 창고에 가둔 일도 있었다. 영릉에 갇혔던 과부와 그녀 오빠의 호소로 이 일이 밝혀졌는데, 그들 말에 따르면 이주석은 수절하려는 과부를 강제로 능군(陵軍)인 김강정과 동거하게 만들려고 이러한 일을 벌였다. 물론 여기에 반하는 증언도 있었다. 당시 이 과부는 이미 김강정과 동거 중이었는데, 워낙 김강정이 가난해서 과부가 이를 못 참고 도망쳤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했다. 사안은 후자에 무게가 실렸다. 그러나 영릉 별검이 자기 부하 부탁으로 사사롭게 과부를 때리고 가둔 것은 그 자체로 범죄였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주석에게는 더 큰 혐의도 있었다. 만약 이게 혐의를 넘어 사실로 밝혀졌다면, 이주석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이주석이 영릉으로 비구니를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는 혐의였다. 다행히 이 일을 적발한 장교는 비구니가 영릉의 재실에 들어오려 해서 바로 능 경계 밖으로 쫓아낸 일은 있지만, 비구니가 춤추고 노래했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이후 이주석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이 사안은 혐의에 그쳤지만, 앞의 두 가지 사실만으로 그는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이주석과 이주명 두 사람은 신문을 받고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이 둘의 처벌이 너무 가볍다며 다시 신문해야 한다는 계사(啓辭·죄를 논하기 위해 왕에게 올리는 문건)를 올리기 시작했다. 혐의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지만, 당시 이주석의 당색이 남인인 탓도 컸다. 결국 이를 지켜보던 지평 류하원이 사간원과 사헌부를 향해 이주석에 대한 계사를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게 다시 문제가 되었다. 류하원 역시 남인이다 보니, 그의 주장이 같은 당을 비호하는 일로 비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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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 문제에 유난히 예민했던 정조는 이주석의 죄가 심한데, 그에 대한 계사를 정지해야 한다는 류하원의 말은 터무니없다면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채제공에게 류하원의 이러한 문제를 알고 있었는지 물었고, 채제공 역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류하원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정조는 류하원을 흑산도에 유배 보냈고, 남인의 영수 채제공도 파직했다(노상추, <노상추일기>).
현대 관점에서 봐도 이주석의 죄는 무겁다. 그러나 그의 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남인의 영수라는 이유로 채제공이 지는 것은 쉬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의 당파는 유학 이념, 즉 도덕적 당위를 기반하여 형성되기에, 같은 당파 내 개인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 공동체 전체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개인의 도덕적 일탈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에 당파 수장의 책임이었다. 물론 도덕보다 효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문화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러나 정치에서 여전히 도덕이 중요 덕목인 우리 사회에서, 많은 도덕적 결격 사유에도 공천부터 하고 보는 정치 문화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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