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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보수 담론의 혁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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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3-26 02:35 조회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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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보수 진영에서 홍보에 열을 올리던 이승만 관련 영화가 상영되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폄훼와 왜곡에 가려진 이승만의 본모습을 회복하여 그를 명실상부한 ‘국부’의 자리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내용과 취지를 가진 영화라고 한다. 안타까웠다. 지금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대한민국, 나아가 전 세계의 현재 상태에서 보수 진영과 보수 담론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가 있고 응당 기여해야 할 바가 있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힘을 쏟고 있는 한국 보수 세력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20세기 기억의 잔재에 붙들려 있는 대한민국 보수 담론의 현재 상태를 다시 한 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국부’라니, 어림도 없다. 우선 나라가 갓난아기도 아닌데 굳이 그것도 남성 하나를 잡아서 ‘아버지’로 지정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방식부터 황당하지만, 백번을 양보하여 ‘국부’라는 개념을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한 칭호가 가장 보편적이 된 이들인 튀르키예의 케말 파샤와 중국의 쑨원은 시종일관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목숨은 물론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내던져 죽는 순간까지 헌신하여 그 자신이 나라의 상징이 되었다. 아무리 좋게 미화하고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아무리 정당화한다고 해도 이승만의 삶은 케말 파샤나 쑨원과 같은 삶이 아니었다. 비교할수록 부끄럽고 민망해질 뿐이며, 당혹스러운 사실들만 계속 쏟아질 뿐이다.
한 예만 들어보자. 이승만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무수한 사람들의 인명을 앗아간 양민학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이라면 양민학살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북한의 위협을 들어 광주에서 양민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던 전두환 세력도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국가의 필요에 따라 국가가 생명과 자유를 지켜주어야 할 국민들을 학살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이야말로 극단적인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입장이 아닌가? 정치적인 논리를 내세워 조직적·체계적으로 양민학살을 벌인 인물이 ‘국부’라고? 그런 일을 벌인 이라면 케말 파샤나 쑨원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에 훨씬 가까운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에서 보수 진영과 보수 담론은 어째서 ‘이승만 국부론’ 따위의 황당한 논리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내친김에 하나 더 지적해보자. 어째서 한국의 보수 담론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에 그토록 관심이 많은가?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썩어빠진 나라였고, 일본제국주의는 근대화와 경제 성장을 가져온 고마운 존재였고, 종군 ‘위안부’들은 기실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매춘부’들일 뿐이었다는 주장에 어째서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떠나서 내가 궁금하고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보수 세력과 보수주의자들 또한 나름의 세계관과 방법론에 입각하여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정치 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진심을 가진 이들이며,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일 이야기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이 수행해야 할 소중한 역할이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그런데 ‘이승만 국부론’ ‘식민지배 정당성론’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왜 몇십년째 주야장천 이 주장을 반복하는가?
우파는 해묵은 이념적 틀 버려야
나는 우리나라의 보수 우파 담론이 20세기의 잔재인 해묵은 이념 논쟁에 여전히 볼모로 붙들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 내리는 굴다리 밑 선술집에서 일부 옛 좌파들이 탁주를 들이켜며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이 스탈린이냐 트로츠키냐, 조선 혁명의 정통이 김일성이냐 박헌영이냐 운운하며 핏발을 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각자 타고난 성향과 각자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진보나 좌파 혹은 보수나 우파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비딕보다도 더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이 ‘사회’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대극의 위치에서 관찰한 이야기들을 모두 들을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을 모두 추려서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산업사회의 운영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토론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문제들을 가지고 금과옥조나 되는 양 핏대를 세우는 이념 편향의 자세는 버려야 한다. 한때 우파 진영에서는 ‘이념에 붙들려 있지 않은 건전한 좌파를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번 이승만 영화 사태를 보면서 이러한 태도가 정말로 절실한 것은 우파 쪽이라는 생각이 든다.
급변하고 있는 21세기 지구촌의 산업문명에서 스스로를 보수 우파의 위치로 자리매김하려는 이들은 무수히 나올 것이며, 응당 그래야 한다. 그리고 보수주의 사상에는 몽테스키외, 버크, 토크빌 등과 같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생각할 거리와 날카로운 혜안을 무궁무진하게 던져주는 위대한 사상가들이 있다. 그리고 저출생 고령화, 인공지능(AI)과 로봇의 등장, 지정학적 구조 변화,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위기, 생태위기 등 우리 모두의 코앞으로 닥쳐온 심대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나는 그런 이들이 그러한 지적 자원에 의지하여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일관되고 힘있는 보수주의의 관점과 해법을 내어오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그래서 그러한 생산적인 보수 세력을 이루고자 하는 이들에게 감히 조언을 드리고자 한다. 보수 담론의 혁신을 위해서는 ‘이승만 국부론’이니 ‘식민지배 정당성론’이니 하는, 실익은 없이 국민들에게 분열만 일으키고 본인들만 고립시키는 이념적 틀을 버려라. 보수주의의 빛나는 미덕과 지혜는 ‘현존 질서(status quo)의 합리성’을 이해하고 착목할 줄 안다는 데에 있다. 비록 혼탁한 현실과 시끄러운 소음에 의해 가려지기 일쑤이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아직 소멸하지 않은 이유가 있으며, 현존하는 질서 또한 그것이 성립하고 유지되는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프랑스 생시몽 재단이 롤 모델
플랫폼 정당, K스타일
‘부자 포퓰리즘’의 정치공학
극우파의 ‘슬픈 정념’이 몰려온다
어떠한 이상을 펼치든 어떠한 논리를 전개하든 항상 그 시작점에 있어서 이러한 현존 질서의 합리성에 굳건히 기반하고 있다는 데에서 보수주의 담론의 무서운 설득력과 현실적 효용성이 나오게 마련이다. 카를 만하임이 말하듯, 좌파는 본성적으로 유토피아주의자일지 모르지만 우파는 본성적으로 현실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현존 질서와 별로 관계도 없는, 그것도 허망하고 허술한 논리의 내러티브로 짜인 이념을 자신들이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신념’으로 착각하는 순간 자신들 본래의 입장과 성격과 장점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는 본인들에게도, 그 논적들에게도, 사회 전체에도 전혀 이롭지 못한 상태를 만들게 된다.
1982년 창설되어 1999년까지 프랑스 우파 지식인들의 집결지로서 우파 담론의 혁신을 가져왔던 생시몽 재단이 한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 역사가 프랑수아 퓌레, 정치경제학자 피에르 로장발롱 등 좌파에 맞서고자 했던 쟁쟁한 지식인들이 함께 모여 우파도 좌파도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갈 것을 표방하며 설립한 재단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들은 국제적인 반공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유무형 지원을 받는 조직이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이름으로 내걸었던 생시몽은 주지하다시피 사회주의 사상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인류 최초로 산업사회의 도래를 간파하고 널리 알렸던 생시몽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변모하는 20세기 말의 산업사회가 풀어야 할 문제들을 우파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했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보수 우파도 그런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시라. 진보 혹은 좌파가 되기 위해서 스탈린주의자나 김일성주의자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수 혹은 우파가 되기 위해서 이승만주의자나 일제지배 찬양론자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냉전의 유산과 트라우마에 붙들리지 않고 21세기의 현실을 따라잡기 위해 과감한 혁신을 할 줄 아는 이들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보수 담론의 혁신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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