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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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2-23 06:03 조회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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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선거철만 되면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유명한 말이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당시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현직 대통령이었던 공화당 후보 조지 W 부시를 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선거 구호이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국민은 불만을 품게 마련이기에 우리의 살림살이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구체적인 희망으로 유권자를 설득하는 후보가 선거에서 이긴다. 이 구호가 유권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사실 사회적 문제를 인식하고 시대정신을 꿰뚫어 본 정치인의 혜안에서 나온다. 모두가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아무리 민생을 내세워도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이 없으면, 말뿐인 구호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온갖 말이 난무하고 선전과 선동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총선 시즌의 핵심 문제를 포착하려면, 우리는 이 구호를 이렇게 바꿔야 한다.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수사를 살펴보면 사람이 하는 정치보다는 법치를 더 많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치와 민주주의는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법의 지배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한 개인의 자의적인 변덕보다는 합리적인 시스템과 민주적 규범이 의사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규범이 깔려 있다. 긴 군사 독재를 경험해서인지 법치는 좋은 것이고, 인치는 나쁜 것이라는 의견이 공고해진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무리 좋더라도 이를 운용하는 사람이 나쁘면 제도가 부식하거나 부패한다는 점이다. 결국 정치를 하는 사람이 문제다.
권력자 말과 이미지 모순에 당혹
법치와 인치, 통치와 권위, 민주주의와 민주적 덕성의 관계를 생각하면, 최근에 논란을 일으켰던 한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시점에서 두 사람이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만났다. 윤 대통령을 만난 한 위원장은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는 여전히 상대방을 하늘처럼 받들거나 절대적인 순종을 표현할 때 머리를 조아린다. 선거유세를 하는 정치인들이 유권자 앞에서 폴더인사를 넘어 종종 엎드려 절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인사가 공손한 태도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지만, 강한 복종을 드러내는 90도 각도 인사는 유교적 권위주의의 잔재이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모두 평상시 법치를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2013년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정 감사 증인으로 나와 말한 이 발언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는 강골 검사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말 하나로 그는 법치의 상징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누구도 맹종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은 공직 생활을 하며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한 가지 기준만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법조계 관료로서 추구한 공공선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말로 자신이 윤석열 아바타라는 세간의 비판에 강력히 반박한다.
우리는 말과 이미지의 모순에 당황한다. 무엇이 진짜 모습이고, 어느 것이 대중을 위해 조작된 이미지인가? 굳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말투, 몸짓, 표정이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결코 공공장소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따르는 대신 옳고 그름을 스스로 가리는 사람은 결코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민주적 제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결코 공개된 자리에서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상식을 배경으로 보면 ‘90도 각도 인사’와 ‘어깨를 툭 치는 행위’가 어떻게 해석될까? 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상호 존중의 민주적 덕성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법치와 인치, 즉 법의 지배와 사람이 하는 정치는 결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법치의 기반인 제도와 규범은 사람이 만들고 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 민생을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 국민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사람. 간단히 말해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권위’가 없다면, 기존의 제도와 관습은 오히려 기득권을 공고하게 만드는 권력 장치로 부패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얻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력은 공공선이라는 이상적 목표에 기여할 수도 있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의 인격과 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정치에서도 문제는 사람이다.
‘민주적 권위’ 상징 정치인 없어
우리의 문제는 자랑스러운 민주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민주적 권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위’는 정치적 개인의 역량과 덕성의 문제라면, ‘권위주의’는 정치를 명령과 복종의 지배관계로 파악하고 다양성을 거부하는 정치 체제의 문제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은 기존의 권위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동일시하고, 민주와 권위를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넬슨 만델라나 앙겔라 메르켈 같은 ‘민주적 권위’를 상징하는 위대한 정치인이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가 희망과 용서와 화해라는 놀라운 덕성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파르트헤이트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민주적 덕성은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사회에서도 필요하다.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포퓰리즘에 맞서 민주적 가치를 용감하게 옹호했으며, 선동보다는 이성적 담론을 강조했다. 정치인의 민주적 덕성은 민주주의 제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진영 논리로 황폐해진 정치의 부족주의를 경계하고 정치인의 자질과 덕성에 주목해야 한다. 왜 우리는 좌우를 넘어서 공동으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 없는가? 왜 우리에게 정치적 지도자는 서로 적대시하는 정치적 파당의 가부장으로 인식되는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권위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면 오히려 권위주의를 강화한다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권위가 없는 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다. 모든 국민이 존중하고 존경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권위가 없다면 정치적 지도자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권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위선 공화국’의 역설
과거를 잊어야 미래가 보인다
정치는 연극이다
민주적 덕성을 갖추지 못한 권위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거짓 권위이다. 민생을 돌보기보다 화려하고 예쁜 옷을 무척 좋아하는 임금이 사기꾼 재봉사에게 속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 싶은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은 과연 무엇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정치적 편향에 순응하는 포퓰리즘은 자신의 오만함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의 위험성을 반영한다. 이야기 속의 임금은 자신의 지위와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여 아첨과 조작에 취약해진다. 정치 지도자들이 유권자의 공익과 복지보다는 개인의 권력과 이미지를 우선시하는 성향이 거짓 권위를 만들어낸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이 시장에 나가 길거리 음식을 먹거나 연탄재를 묻힌 채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단지 이미지 때문이다. 누구도 그런 정치적 엘리트들이 서민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봉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천을 짜는 척하면서 임금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맹목적 복종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멍청한 임금을 만든 것은 사실 권력자의 행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다. 임금이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인정하지 인스타 팔로워 않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불편한 진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임금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더라도 국민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착각을 깨부수는 것은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고 폭로하는 어린아이의 용기다. 이 어린아이는 지금 총선을 앞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온갖 말이 난무하고 선전과 선동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총선 시즌의 핵심 문제를 포착하려면, 우리는 이 구호를 이렇게 바꿔야 한다.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정치인들의 수사를 살펴보면 사람이 하는 정치보다는 법치를 더 많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법치와 민주주의는 물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법의 지배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한 개인의 자의적인 변덕보다는 합리적인 시스템과 민주적 규범이 의사결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규범이 깔려 있다. 긴 군사 독재를 경험해서인지 법치는 좋은 것이고, 인치는 나쁜 것이라는 의견이 공고해진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무리 좋더라도 이를 운용하는 사람이 나쁘면 제도가 부식하거나 부패한다는 점이다. 결국 정치를 하는 사람이 문제다.
권력자 말과 이미지 모순에 당혹
법치와 인치, 통치와 권위, 민주주의와 민주적 덕성의 관계를 생각하면, 최근에 논란을 일으켰던 한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시점에서 두 사람이 충남 서천특화시장 화재 현장에서 만났다. 윤 대통령을 만난 한 위원장은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윤 대통령은 한 위원장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는 여전히 상대방을 하늘처럼 받들거나 절대적인 순종을 표현할 때 머리를 조아린다. 선거유세를 하는 정치인들이 유권자 앞에서 폴더인사를 넘어 종종 엎드려 절을 하기도 한다. 이런 인사가 공손한 태도로 받아들여질지는 모르지만, 강한 복종을 드러내는 90도 각도 인사는 유교적 권위주의의 잔재이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모두 평상시 법치를 큰 목소리로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2013년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의 특별수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정 감사 증인으로 나와 말한 이 발언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는 강골 검사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 말 하나로 그는 법치의 상징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누구도 맹종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자신은 공직 생활을 하며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한 가지 기준만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법조계 관료로서 추구한 공공선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이 말로 자신이 윤석열 아바타라는 세간의 비판에 강력히 반박한다.
우리는 말과 이미지의 모순에 당황한다. 무엇이 진짜 모습이고, 어느 것이 대중을 위해 조작된 이미지인가? 굳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말투, 몸짓, 표정이 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남을 배려하는 사람은 결코 공공장소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남이 시키는 대로 덮어놓고 따르는 대신 옳고 그름을 스스로 가리는 사람은 결코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민주적 제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은 결코 공개된 자리에서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이런 상식을 배경으로 보면 ‘90도 각도 인사’와 ‘어깨를 툭 치는 행위’가 어떻게 해석될까? 법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상호 존중의 민주적 덕성은 보여주지 못하는 것일까?
법치와 인치, 즉 법의 지배와 사람이 하는 정치는 결코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법치의 기반인 제도와 규범은 사람이 만들고 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을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 민생을 위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사람, 국민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사람. 간단히 말해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권위’가 없다면, 기존의 제도와 관습은 오히려 기득권을 공고하게 만드는 권력 장치로 부패한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권력을 얻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권력은 공공선이라는 이상적 목표에 기여할 수도 있고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적 목표를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인의 인격과 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정치에서도 문제는 사람이다.
‘민주적 권위’ 상징 정치인 없어
우리의 문제는 자랑스러운 민주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아직 ‘민주적 권위’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권위’는 정치적 개인의 역량과 덕성의 문제라면, ‘권위주의’는 정치를 명령과 복종의 지배관계로 파악하고 다양성을 거부하는 정치 체제의 문제다. 따라서 민주화 과정은 기존의 권위주의로부터의 해방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동일시하고, 민주와 권위를 모순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는 아직 넬슨 만델라나 앙겔라 메르켈 같은 ‘민주적 권위’를 상징하는 위대한 정치인이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넬슨 만델라가 희망과 용서와 화해라는 놀라운 덕성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파르트헤이트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은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민주적 덕성은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사회에서도 필요하다. 전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포퓰리즘에 맞서 민주적 가치를 용감하게 옹호했으며, 선동보다는 이성적 담론을 강조했다. 정치인의 민주적 덕성은 민주주의 제도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진영 논리로 황폐해진 정치의 부족주의를 경계하고 정치인의 자질과 덕성에 주목해야 한다. 왜 우리는 좌우를 넘어서 공동으로 존경할 만한 정치인이 없는가? 왜 우리에게 정치적 지도자는 서로 적대시하는 정치적 파당의 가부장으로 인식되는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권위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면 오히려 권위주의를 강화한다는 역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권위가 없는 권위주의’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다. 모든 국민이 존중하고 존경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는 권위가 없다면 정치적 지도자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권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다.
‘위선 공화국’의 역설
과거를 잊어야 미래가 보인다
정치는 연극이다
민주적 덕성을 갖추지 못한 권위는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거짓 권위이다. 민생을 돌보기보다 화려하고 예쁜 옷을 무척 좋아하는 임금이 사기꾼 재봉사에게 속는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 싶은 사람의 눈에만 보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신기한 옷은 과연 무엇일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정치적 편향에 순응하는 포퓰리즘은 자신의 오만함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의 위험성을 반영한다. 이야기 속의 임금은 자신의 지위와 이미지에 너무 집착하여 아첨과 조작에 취약해진다. 정치 지도자들이 유권자의 공익과 복지보다는 개인의 권력과 이미지를 우선시하는 성향이 거짓 권위를 만들어낸다. 선거철마다 정치인들이 시장에 나가 길거리 음식을 먹거나 연탄재를 묻힌 채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단지 이미지 때문이다. 누구도 그런 정치적 엘리트들이 서민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봉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천을 짜는 척하면서 임금을 속일 수 있었던 것은 맹목적 복종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멍청한 임금을 만든 것은 사실 권력자의 행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다. 임금이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인정하지 인스타 팔로워 않는 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불편한 진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임금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하더라도 국민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착각을 깨부수는 것은 거짓에 의문을 제기하고 폭로하는 어린아이의 용기다. 이 어린아이는 지금 총선을 앞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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