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호 “국회의장 선거, 당대표 관여 부적절···조정식·정성호 불출마에 자괴감 들어”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5-16 16:30 조회7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의장은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라며 구도를 정리하는 일을 대표나 원내대표가 관여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비판했다.
우 의원은 지난 13일 오후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민주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당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들의 판단에 맡겨서 후보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은 추미애 당선인과 우원식 의원 양자 구도로 정리됐다. 앞서 출사표를 던졌던 정성호 의원(5선)은 지난 12일 경선 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조정식 의원(6선)은 같은 날 추 당선인과 회동 뒤 단일화를 선언하고 후보직을 내려놨다. 친이재명계 핵심부가 후보 교통정리에 나선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우 의원은 5선, 6선쯤 되는 중진 의원들이 처음부터 나오지 말든가 나와서 중간에 드롭하는 모양을 보면서 ‘이건 또 뭔가’ 저는 사실 자괴감 같은 게 들었다며 만일 보도된 것처럼 이 두 분이 박찬대 원내대표나 혹은 이재명 대표와 가까운 혹은 본인, 이런 분들의 어떤 권유를 받아서 중단한 거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예를 들어 상임위원장이다, 그럼 그건 (당 지도부가) 당연히 관여해야 된다며 그러나 국회의장을,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를 당대표나 원내대표가 결정한다? 저는 이건 뭔가 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추 당선인이 (이 대표가) ‘잘 좀 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후보님한테는 그렇게 안 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국회의장 되시겠다 나오신 분이 이런저런 정치적 쟁점에 대한 말씀하시는 건 좀 삼가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국회의장 후보자를 선정하는 경선 자체만 유독 이런저런 얘기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 저는 적절치 않아 보이고 민주당의 오랜 관행과 관례를 깬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 당선인은 13일 오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오늘 아침 정성호 의원님으로부터 응원과 기대의 말씀이 있었다며 총선 민심과 개혁 국회를 위한 두 후보님의 대승적 결단이 헛되지 않도록 순리와 당심이 이끄는 길로 더 겸허히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해외 원전 수주를 위해 직접 나섰다.
15일 두산그룹에 따르면 박 회장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 조핀 궁전에서 열린 ‘두산 파트너십 데이’에서 원전 사업 수주 지원 행사를 직접 주관했다.
이번 행사는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원전 건설 사업 참여를 위한 최종 입찰서를 제출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얀 피셔 전 총리, 페트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트레쉬냑 산업부 차관, 토마스 에흘레르 산업부 부실장 등 체코 정부와 기업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안세진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산업정책국장, 박인식 한수원 수출사업본부장, 스캇 박 두산밥캣 부회장 등이 자리했다.
두산그룹은 한수원이 체코 원전 사업을 수주할 경우 원자로, 증기 발생기 등 1차 계통 주기기는 두산에너빌리티가 공급하고, 증기터빈 등 2차 계통 주기기는 체코 자회사인 두산스코다파워가 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유한 수소·가스터빈 등 무탄소 발전 기술을 두산스코다파워에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산그룹의 자회사인 두산에너빌리티도 이날 행사에서 스코다JS 등 현지 발전 설비 기업들과 체코 원전 사업 수주를 전제로 원전 주기기와 보조기기 공급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박 회장은 두산은 수출 1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에 성공적으로 주기기를 공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15년 만에 다시 도전하는 해외 원전 수주에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행사 다음 날인 14일 두산스코다파워를 방문해 생산 현장을 점검했다. 1869년에 설립돼 2009년 두산에 합류한 두산스코다파워는 원자력 발전소에 들어가는 증기 터빈을 생산한다.
박 회장은 체코 도브리스를 찾아 중소형 로더와 굴착기를 생산하는 두산밥캣 EMEA 사업장도 살펴봤다. 두산밥캣 EMEA이 지난 10년간 신규 설비 도입, 생산 증대를 위해 투자한 금액은 25억코루나(1460억원)에 이른다.
이남순씨(67)는 3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손바닥만 한 작은 빨간색 파우치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내뿜고, 물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든 작은 병에 담뱃재를 톡톡 털고, 다시 한 개비 꺼내고를 반복했다.
내가 밥을 잘 안 먹어요. 3일에 한 번 먹을까? 배가 안 고파. 그 대신 담배를 달고 살아요. 그리고 커피를 맨날 수십 잔 마셔요. 이걸 마셔야 안 불안하거든. 병원에 가면 동생이 의사 선생님한테 내가 커피랑 담배만 먹는다고 이르더라고.
이남순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계엄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당사자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씨의 사건을 포함한 16건의 피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개인들이 겪은 폭력의 주체가 국가 공권력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1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기자와 만난 이씨는 이렇게 되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면서 내가 갖고 있던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게 규명된 거니까, 후련하고 좋았다고 말했다. 다 살고 갈 때 되니까 인제는 국가가 인정해주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전남 곡성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자랑이자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영특한 아이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서너살 때 ‘천자’니 ‘소학’을 뗐대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대가 정말 컸어요. 여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공장으로 가는 게 당연한 시대였는데, 저는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죠.
똑부러지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의 삶은 1980년 5월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스물세 살의 그는 남동생과 함께 광주에 살며 수예점에서 일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은 그가 매일 출퇴근하는 길이었다.
5·18 이전엔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그날 시민들, 학생들이 진압되는 걸 보고 저도 도청 앞으로 나간 거죠. 그 뒤로 도청이랑 YWCA 건물을 오가면서 밥을 지어 나르고, 상무관에서 시신을 닦으면서 도왔어요. 일부러 골목골목 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보고요. 고등학생 세명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붕대 감아주고, 치료해주고, 옷 싹 빨아서 집에 돌려보내고 그랬죠.
계엄군에게 붙잡힌 건 5월 27일, YWCA 건물 1층 주방에서다. 전날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더니 새벽에 요란한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같이 있던 대학생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걸 봤다. 혼비백산한 이씨는 사람이 총에 맞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구타가 계속됐다. 그때 하복부에 심한 구타를 당했다. 밖으로 끌려 나와 지프차를 타려고 한 발을 들어 올렸을 때 엉덩이 뒤편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몸을 찔렀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자 다시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대로 까무러쳤다가 깨어났을 땐 국군광주통합병원 복도였다.
병원에서 계속 하혈을 했고, 닦을 것 좀 달라고 하니 그런 건 없대요. 옆에 쓰레기통을 보니까 다른 환자들이 감고 버린 붕대가 쌓여 있길래 그걸 아래에 대서 쓰고 버리고 했어요. 그때 어떤 군의관이 ‘대검으로 찍었구먼’ 하더라고요. 그제야 내가 뭐에 찔린 건 줄 알게 됐죠.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뒤에도 이씨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사람이 많아서 끼어 자야 했고, 2인당 한 개씩 나눠주는 모포는 그가 흘린 피로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돌아온 건 생리대가 아닌 신문지였다. 악취가 난다라며 하혈이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 있으라는 모욕도 함께였다.
그는 구금 한 달여 만에 훈방됐다. 한 달에 월경을 3주나 하고, 약을 먹어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집 앞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진 못했다. 병원 다닐 여유도 없고, 돈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의사였는데 다시 가서 또 거길 보여주는 것도 싫었고요.
정말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몸’이 됐다고 생각한 건 어느 날 목욕탕에 갔을 때다. 때를 밀어달라고 하고 누워 있는데 세신사가 ‘이거 왜 이렇게 생겼냐, 이런 사람 처음 본다’고 한 거예요. 치료를 제때 안 하니까 상처가 자기 마음대로 나으면서 이상하게 된 거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알았으면 때를 안 밀었는데…. 그 뒤로 목욕탕엘 안 가요.
일련의 경험은 이씨가 삶 전체를 바라보는 인식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등학생 땐 서울 명동 길거리에서 누가 연락처를 물어볼 정도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했다며 그런데 사건 이후로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도, 나한테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두려웠다. 내 피해를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궁 적출 수술까지 하게 됐고 ‘여자로서 끝났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산부인과에 다시 가봤어요. 내가 누굴 만나 결혼하거나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안 된대요. 이미 석회화돼서 들어내야 한다고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하고 돌아왔죠. 그리고 상대방한테 말했어요. ‘너랑 사귀는 건 안 될 것 같아. 친구나 하자’고요.
그는 지인의 아들을 입양했다. 결혼하지 않은 데다 일정한 직장이나 수입도 없어서 현재 ‘동거인’으로 살고 있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현재 20대 중반의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 역할’을 한 건 이씨다. 그는 아들은 내 삶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아들을 키우냐고 하는데, 나는 여자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왜냐면 내 삶이 안 좋으니까. 딸을 키웠다가 나 같이 되면 어쩔 거야. 그래서 지금 아들이 너무 좋아요.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씨가 겪은 피해에 대해 ‘성적 모욕 및 학대’와 ‘재생산 폭력’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생산 폭력은 강간으로 인한 임신·유산, 구타·자상 등으로 인한 유산·자궁 적출 등 재생산 권리가 침해된 폭력을 말한다. 위원회는 2005년 5·18 관련자 보상 신청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작성한 소견서에 따르면 이씨가 자궁 적출 수술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고 했다. 수술을 권한 당시 병원에서는 혈이 뒤로 넘어가서 골반강 내에 염증을 일으키고, 출혈과 요통을 유발한다고 진단했다.
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사람들의 시선과 낙인이 두려워 이야기할 수도 없었던 과거는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종일 커피와 담배만 달고 사는 것도 후유증의 일부다. 수술 뒤에 이씨는 스스로 자궁 없는 병신 같다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쓰지도 않을 생리대와 월경 팬티를 샀다. 주위에서 ‘자궁 없는 여자는 사람 구실 못한다’고 수군댈 것 같아서다.
그는 2018년부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로 진료받았고, 지금도 매일 8종류나 되는 약을 먹는다. 그래도 푹 자는 건 고작 1시간 남짓이다. 이씨는 항상 뒤척이다가 똑같은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상무관에서의 꿈이다. 바닥에는 시신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걸 보는 자신이 있다. 죽은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물을 알코올 솜으로, 물 묻힌 천으로 계속 닦는 꿈이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밀한 피해 경험에 관해 얘기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이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참 미웠나 봅니다. 여동생이 ‘처녀 농군’이었어요. 전두환이가 농촌지도자상을 주러 오는데, 군청에선 내가 언니인지 몰랐던 거예요. 비상이 걸렸죠. 동네 이장이 나한테 고향에 오지 말라더라고요.
이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 눈을 피해 기도원 등을 돌아다니다가 쫓겨나듯 미국으로 갔다. 그는 기존 혈연, 지연 등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의 단절을 경험하는 2차 피해를 입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다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큰 돈이었던 700만원을 마련한 아버지는 브로커에게 돈을 보냈고 이씨는 비자를 받아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 식품점에서 일하며 살았다.
미국 가라고 할 때는 안 서운했어요, 좋았어요. 왜냐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으니까. 사건 이후에 동네 사람들이 ‘가시내한테 글을 가르쳐서 집안이 망했다, 진작 돈 벌러 공장 보내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다른 식구들이 손가락질당한다는 죄책감이 컸죠. 항상 어떤 기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쭈뼛거리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2004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재작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첫째 딸은 마지막까지 투명 인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씨는 임종 직전까지 내가 돌봐드렸는데, 마지막 숨 직전에야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 봤다고 말했다.
나는 살면서 우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은 한 방울도 안 흘렸어. 그래도 좀 원망했어요. 그때 아버지를 꽉 잡고, 나한테 말 한 마디만 하고 가라고 화를 냈어요. ‘아버지, 내 이름 한 번이라도 불러볼 걸, 안 불러서 미안하다고 해. 잘못했다고 해. 그럼 내가 용서해줄게. 아무 말 없이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아버지도 힘들었지만 나도 힘들었어, 진짜로 힘들었거든.’
이씨의 이야기는 강간만이 성폭력 피해라고 보는 견해가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회복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평생 그날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를 괴롭혔던 것도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점, 누군가 얘기를 들어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그는 2005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을 했다. 장해등급 12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40여년 전의 치료 기록이 없어 연행 이후 38일간의 구금 일수만으로 피해를 따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돈은 10원도 안 줘도 된다. 그런데 내가 그때 고통받고 억울했던 일이 12급밖에 안된다는 게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피해 경험과 신체적·정신적·사회 관계적 후유증에 집중한 이번 조사위원회의 조사는 그에게 처음으로 큰 회복과 치유의 경험이 됐다. 위원회가 보상 심의 자료 전수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을 먼저 인지하고 이씨에게 조사 참여를 설득했다.
이씨는 처음에 조사팀에서 전화했을 때 ‘내 정보를 어디서 알았느냐’며 벌컥 화를 냈다고 말했다. 상담 선생님들이 곡성까지 나를 만나러 왔는데, 왜 출장비 쓰면서 여기까지 오느냐고 했어요. 그 돈 있으면 다른 데 쓰라고 했죠. 남의 치부를 드러내러 오니까 밉잖아요. 입 다물고 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손가락질당할 줄만 알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성폭력 피해자가 말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원래 가족들도 내 이야기를 잘 몰랐어요. 위원회에서 이춘희 전 팀장님을 만나면서 선생님이 피해자도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어요. 그리고 지난해 결국 진상규명 결정이 났을 땐 드디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후우’ 하고.
조사위원회는 이씨의 사례에 대해 사건 이후 생애사를 관통한 피해와 후유증은 성차별적인 통념을 내면화한 자신에게서 비롯한 점도 있지만, 20대에 가족과 고국을 떠나 내면의 진실을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이제라도 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를 회복할 수 있는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하고, 그 시작이 바로 이 피해에 대한 온전한 인정이라고 했다.
1989년 전옥주도, 1996년 비구니 피해자도 말했다…협박·외면 딛고 44년 만에 ‘사실’이 된 피해
정현순 늘 심연 속에 살았다 삶의 뿌리를 짓눌러온 그날의 수치…‘성폭력=낙인’ 잘못된 관념을 바꿔야
말할 수 없던 ‘5·18 성폭력’…서로의 ‘증언’이 되어 함께 끝까지
이씨는 갑상샘암과 직장암을 앓았고 수술도 여러 번 했다. 동네에선 결국 아무개가 죽었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절대 죽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슬픔도 분노도 모두 꾹꾹 눌러 참기만 했던 그가 눈물을 보인 건 지난달 28일 광주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 10명이 처음 만난 간담회 자리에서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약해 보이기 싫어서 진짜 어디서 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선 울려고 마음도 안 먹었는데 눈물 콧물 다 나오면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아마 다른 피해자들 얘기를 들으니까 그랬겠죠. 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겠다, 나도 그렇게 살아봤잖아요. 그러면서 여태껏 누구한테도 얘기를 못 했던 내 상황이 슬펐던 것 같아요. ‘여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조금만 깨어났으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더 재미있게 살았을 텐데 말이예요.
우 의원은 지난 13일 오후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민주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중시하는 정당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원들의 판단에 맡겨서 후보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경선은 추미애 당선인과 우원식 의원 양자 구도로 정리됐다. 앞서 출사표를 던졌던 정성호 의원(5선)은 지난 12일 경선 후보직을 자진 사퇴했다. 조정식 의원(6선)은 같은 날 추 당선인과 회동 뒤 단일화를 선언하고 후보직을 내려놨다. 친이재명계 핵심부가 후보 교통정리에 나선 결과라는 분석이 나왔다.
우 의원은 5선, 6선쯤 되는 중진 의원들이 처음부터 나오지 말든가 나와서 중간에 드롭하는 모양을 보면서 ‘이건 또 뭔가’ 저는 사실 자괴감 같은 게 들었다며 만일 보도된 것처럼 이 두 분이 박찬대 원내대표나 혹은 이재명 대표와 가까운 혹은 본인, 이런 분들의 어떤 권유를 받아서 중단한 거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우 의원은 예를 들어 상임위원장이다, 그럼 그건 (당 지도부가) 당연히 관여해야 된다며 그러나 국회의장을, 대한민국 권력 서열 2위를 당대표나 원내대표가 결정한다? 저는 이건 뭔가 좀 잘못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추 당선인이 (이 대표가) ‘잘 좀 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른 후보님한테는 그렇게 안 했다고 밝힌 것에 대해서는 국회의장 되시겠다 나오신 분이 이런저런 정치적 쟁점에 대한 말씀하시는 건 좀 삼가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국회의장 후보자를 선정하는 경선 자체만 유독 이런저런 얘기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것이 저는 적절치 않아 보이고 민주당의 오랜 관행과 관례를 깬 것이라고 지적했다.
추 당선인은 13일 오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글을 올려 오늘 아침 정성호 의원님으로부터 응원과 기대의 말씀이 있었다며 총선 민심과 개혁 국회를 위한 두 후보님의 대승적 결단이 헛되지 않도록 순리와 당심이 이끄는 길로 더 겸허히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밝혔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해외 원전 수주를 위해 직접 나섰다.
15일 두산그룹에 따르면 박 회장은 지난 13일(현지시간) 체코 프라하 조핀 궁전에서 열린 ‘두산 파트너십 데이’에서 원전 사업 수주 지원 행사를 직접 주관했다.
이번 행사는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원전 건설 사업 참여를 위한 최종 입찰서를 제출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얀 피셔 전 총리, 페트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트레쉬냑 산업부 차관, 토마스 에흘레르 산업부 부실장 등 체코 정부와 기업 관계자 30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에서는 안세진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산업정책국장, 박인식 한수원 수출사업본부장, 스캇 박 두산밥캣 부회장 등이 자리했다.
두산그룹은 한수원이 체코 원전 사업을 수주할 경우 원자로, 증기 발생기 등 1차 계통 주기기는 두산에너빌리티가 공급하고, 증기터빈 등 2차 계통 주기기는 체코 자회사인 두산스코다파워가 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유한 수소·가스터빈 등 무탄소 발전 기술을 두산스코다파워에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두산그룹의 자회사인 두산에너빌리티도 이날 행사에서 스코다JS 등 현지 발전 설비 기업들과 체코 원전 사업 수주를 전제로 원전 주기기와 보조기기 공급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박 회장은 두산은 수출 1호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에 성공적으로 주기기를 공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15년 만에 다시 도전하는 해외 원전 수주에 최선을 다해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행사 다음 날인 14일 두산스코다파워를 방문해 생산 현장을 점검했다. 1869년에 설립돼 2009년 두산에 합류한 두산스코다파워는 원자력 발전소에 들어가는 증기 터빈을 생산한다.
박 회장은 체코 도브리스를 찾아 중소형 로더와 굴착기를 생산하는 두산밥캣 EMEA 사업장도 살펴봤다. 두산밥캣 EMEA이 지난 10년간 신규 설비 도입, 생산 증대를 위해 투자한 금액은 25억코루나(1460억원)에 이른다.
이남순씨(67)는 3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손바닥만 한 작은 빨간색 파우치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연기를 내뿜고, 물이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든 작은 병에 담뱃재를 톡톡 털고, 다시 한 개비 꺼내고를 반복했다.
내가 밥을 잘 안 먹어요. 3일에 한 번 먹을까? 배가 안 고파. 그 대신 담배를 달고 살아요. 그리고 커피를 맨날 수십 잔 마셔요. 이걸 마셔야 안 불안하거든. 병원에 가면 동생이 의사 선생님한테 내가 커피랑 담배만 먹는다고 이르더라고.
이남순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일부 계엄군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당한 당사자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이씨의 사건을 포함한 16건의 피해에 대해 ‘진상규명’ 결정을 내렸다. 당시 개인들이 겪은 폭력의 주체가 국가 공권력이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지난 1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기자와 만난 이씨는 이렇게 되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참 오래도 걸렸다면서 내가 갖고 있던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게 규명된 거니까, 후련하고 좋았다고 말했다. 다 살고 갈 때 되니까 인제는 국가가 인정해주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죠.
전남 곡성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6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집안의 자랑이자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영특한 아이였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서너살 때 ‘천자’니 ‘소학’을 뗐대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기대가 정말 컸어요. 여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바로 공장으로 가는 게 당연한 시대였는데, 저는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말 다 했죠.
똑부러지고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그의 삶은 1980년 5월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 스물세 살의 그는 남동생과 함께 광주에 살며 수예점에서 일했다.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은 그가 매일 출퇴근하는 길이었다.
5·18 이전엔 한 번도 시위에 참여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그날 시민들, 학생들이 진압되는 걸 보고 저도 도청 앞으로 나간 거죠. 그 뒤로 도청이랑 YWCA 건물을 오가면서 밥을 지어 나르고, 상무관에서 시신을 닦으면서 도왔어요. 일부러 골목골목 다니면서 다친 사람들이 있는지도 살펴보고요. 고등학생 세명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붕대 감아주고, 치료해주고, 옷 싹 빨아서 집에 돌려보내고 그랬죠.
계엄군에게 붙잡힌 건 5월 27일, YWCA 건물 1층 주방에서다. 전날부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더니 새벽에 요란한 총소리가 귀를 때렸다. 같이 있던 대학생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는 걸 봤다. 혼비백산한 이씨는 사람이 총에 맞았다,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쳤지만 구타가 계속됐다. 그때 하복부에 심한 구타를 당했다. 밖으로 끌려 나와 지프차를 타려고 한 발을 들어 올렸을 때 엉덩이 뒤편에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몸을 찔렀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자 다시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대로 까무러쳤다가 깨어났을 땐 국군광주통합병원 복도였다.
병원에서 계속 하혈을 했고, 닦을 것 좀 달라고 하니 그런 건 없대요. 옆에 쓰레기통을 보니까 다른 환자들이 감고 버린 붕대가 쌓여 있길래 그걸 아래에 대서 쓰고 버리고 했어요. 그때 어떤 군의관이 ‘대검으로 찍었구먼’ 하더라고요. 그제야 내가 뭐에 찔린 건 줄 알게 됐죠.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뒤에도 이씨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사람이 많아서 끼어 자야 했고, 2인당 한 개씩 나눠주는 모포는 그가 흘린 피로 딱딱하게 굳을 정도였다. 어떻게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그에게 돌아온 건 생리대가 아닌 신문지였다. 악취가 난다라며 하혈이 멈출 때까지 화장실에 있으라는 모욕도 함께였다.
그는 구금 한 달여 만에 훈방됐다. 한 달에 월경을 3주나 하고, 약을 먹어도 통증이 멈추지 않아 집 앞 산부인과를 찾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진 못했다. 병원 다닐 여유도 없고, 돈도 없었어요. 할아버지 의사였는데 다시 가서 또 거길 보여주는 것도 싫었고요.
정말로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몸’이 됐다고 생각한 건 어느 날 목욕탕에 갔을 때다. 때를 밀어달라고 하고 누워 있는데 세신사가 ‘이거 왜 이렇게 생겼냐, 이런 사람 처음 본다’고 한 거예요. 치료를 제때 안 하니까 상처가 자기 마음대로 나으면서 이상하게 된 거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알았으면 때를 안 밀었는데…. 그 뒤로 목욕탕엘 안 가요.
일련의 경험은 이씨가 삶 전체를 바라보는 인식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는 고등학생 땐 서울 명동 길거리에서 누가 연락처를 물어볼 정도로,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표했다며 그런데 사건 이후로 남자친구가 생기는 것도, 나한테 누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두려웠다. 내 피해를 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자궁 적출 수술까지 하게 됐고 ‘여자로서 끝났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산부인과에 다시 가봤어요. 내가 누굴 만나 결혼하거나 애를 낳을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안 된대요. 이미 석회화돼서 들어내야 한다고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하더라고요. 그렇구나, 하고 돌아왔죠. 그리고 상대방한테 말했어요. ‘너랑 사귀는 건 안 될 것 같아. 친구나 하자’고요.
그는 지인의 아들을 입양했다. 결혼하지 않은 데다 일정한 직장이나 수입도 없어서 현재 ‘동거인’으로 살고 있지만, 갓난아기 때부터 현재 20대 중반의 대학생이 될 때까지 ‘엄마 역할’을 한 건 이씨다. 그는 아들은 내 삶의 증인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왜 아들을 키우냐고 하는데, 나는 여자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왜냐면 내 삶이 안 좋으니까. 딸을 키웠다가 나 같이 되면 어쩔 거야. 그래서 지금 아들이 너무 좋아요.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이씨가 겪은 피해에 대해 ‘성적 모욕 및 학대’와 ‘재생산 폭력’에 해당한다고 봤다. 재생산 폭력은 강간으로 인한 임신·유산, 구타·자상 등으로 인한 유산·자궁 적출 등 재생산 권리가 침해된 폭력을 말한다. 위원회는 2005년 5·18 관련자 보상 신청 당시 산부인과 의사가 작성한 소견서에 따르면 이씨가 자궁 적출 수술한 것이 사실로 확인된다고 했다. 수술을 권한 당시 병원에서는 혈이 뒤로 넘어가서 골반강 내에 염증을 일으키고, 출혈과 요통을 유발한다고 진단했다.
피해를 인정받을 수도, 사람들의 시선과 낙인이 두려워 이야기할 수도 없었던 과거는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고, 종일 커피와 담배만 달고 사는 것도 후유증의 일부다. 수술 뒤에 이씨는 스스로 자궁 없는 병신 같다라고 생각했다. 일부러 쓰지도 않을 생리대와 월경 팬티를 샀다. 주위에서 ‘자궁 없는 여자는 사람 구실 못한다’고 수군댈 것 같아서다.
그는 2018년부터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로 진료받았고, 지금도 매일 8종류나 되는 약을 먹는다. 그래도 푹 자는 건 고작 1시간 남짓이다. 이씨는 항상 뒤척이다가 똑같은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상무관에서의 꿈이다. 바닥에는 시신들이 나란히 놓여 있고, 그걸 보는 자신이 있다. 죽은 사람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물을 알코올 솜으로, 물 묻힌 천으로 계속 닦는 꿈이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내밀한 피해 경험에 관해 얘기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이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 몰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참 미웠나 봅니다. 여동생이 ‘처녀 농군’이었어요. 전두환이가 농촌지도자상을 주러 오는데, 군청에선 내가 언니인지 몰랐던 거예요. 비상이 걸렸죠. 동네 이장이 나한테 고향에 오지 말라더라고요.
이후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고, 사람들 눈을 피해 기도원 등을 돌아다니다가 쫓겨나듯 미국으로 갔다. 그는 기존 혈연, 지연 등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의 단절을 경험하는 2차 피해를 입게 됐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집에다 두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큰 돈이었던 700만원을 마련한 아버지는 브로커에게 돈을 보냈고 이씨는 비자를 받아 뉴욕으로 갔다. 그는 그곳 식품점에서 일하며 살았다.
미국 가라고 할 때는 안 서운했어요, 좋았어요. 왜냐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살 수 있으니까. 사건 이후에 동네 사람들이 ‘가시내한테 글을 가르쳐서 집안이 망했다, 진작 돈 벌러 공장 보내지’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다른 식구들이 손가락질당한다는 죄책감이 컸죠. 항상 어떤 기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쭈뼛거리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2004년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재작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첫째 딸은 마지막까지 투명 인간으로 남아 있었다. 이씨는 임종 직전까지 내가 돌봐드렸는데, 마지막 숨 직전에야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화를 내 봤다고 말했다.
나는 살면서 우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눈물은 한 방울도 안 흘렸어. 그래도 좀 원망했어요. 그때 아버지를 꽉 잡고, 나한테 말 한 마디만 하고 가라고 화를 냈어요. ‘아버지, 내 이름 한 번이라도 불러볼 걸, 안 불러서 미안하다고 해. 잘못했다고 해. 그럼 내가 용서해줄게. 아무 말 없이 이렇게 가면 안 되지. 아버지도 힘들었지만 나도 힘들었어, 진짜로 힘들었거든.’
이씨의 이야기는 강간만이 성폭력 피해라고 보는 견해가 얼마나 좁은 것인지를 보여준다. 회복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는 평생 그날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그를 괴롭혔던 것도 자신의 피해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는 점, 누군가 얘기를 들어주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그는 2005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신청’을 했다. 장해등급 12급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40여년 전의 치료 기록이 없어 연행 이후 38일간의 구금 일수만으로 피해를 따졌기 때문이다. 이씨는 돈은 10원도 안 줘도 된다. 그런데 내가 그때 고통받고 억울했던 일이 12급밖에 안된다는 게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피해 경험과 신체적·정신적·사회 관계적 후유증에 집중한 이번 조사위원회의 조사는 그에게 처음으로 큰 회복과 치유의 경험이 됐다. 위원회가 보상 심의 자료 전수조사 과정에서 이 사건을 먼저 인지하고 이씨에게 조사 참여를 설득했다.
이씨는 처음에 조사팀에서 전화했을 때 ‘내 정보를 어디서 알았느냐’며 벌컥 화를 냈다고 말했다. 상담 선생님들이 곡성까지 나를 만나러 왔는데, 왜 출장비 쓰면서 여기까지 오느냐고 했어요. 그 돈 있으면 다른 데 쓰라고 했죠. 남의 치부를 드러내러 오니까 밉잖아요. 입 다물고 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손가락질당할 줄만 알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성폭력 피해자가 말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고 했다. 원래 가족들도 내 이야기를 잘 몰랐어요. 위원회에서 이춘희 전 팀장님을 만나면서 선생님이 피해자도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어요. 그리고 지난해 결국 진상규명 결정이 났을 땐 드디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후우’ 하고.
조사위원회는 이씨의 사례에 대해 사건 이후 생애사를 관통한 피해와 후유증은 성차별적인 통념을 내면화한 자신에게서 비롯한 점도 있지만, 20대에 가족과 고국을 떠나 내면의 진실을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할 수 없었던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며 이제라도 PTSD와 재발성 우울 장애를 회복할 수 있는 국가의 책임 있는 조치가 필요하고, 그 시작이 바로 이 피해에 대한 온전한 인정이라고 했다.
1989년 전옥주도, 1996년 비구니 피해자도 말했다…협박·외면 딛고 44년 만에 ‘사실’이 된 피해
정현순 늘 심연 속에 살았다 삶의 뿌리를 짓눌러온 그날의 수치…‘성폭력=낙인’ 잘못된 관념을 바꿔야
말할 수 없던 ‘5·18 성폭력’…서로의 ‘증언’이 되어 함께 끝까지
이씨는 갑상샘암과 직장암을 앓았고 수술도 여러 번 했다. 동네에선 결국 아무개가 죽었다더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절대 죽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슬픔도 분노도 모두 꾹꾹 눌러 참기만 했던 그가 눈물을 보인 건 지난달 28일 광주에서 5·18 성폭력 피해자 10명이 처음 만난 간담회 자리에서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약해 보이기 싫어서 진짜 어디서 울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선 울려고 마음도 안 먹었는데 눈물 콧물 다 나오면서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아마 다른 피해자들 얘기를 들으니까 그랬겠죠. 다 사는 게 너무 힘들었겠다, 나도 그렇게 살아봤잖아요. 그러면서 여태껏 누구한테도 얘기를 못 했던 내 상황이 슬펐던 것 같아요. ‘여자가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조금만 깨어났으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더 재미있게 살았을 텐데 말이예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