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법조인의 정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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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지훈 작성일24-05-16 15:49 조회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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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신문은 4월15일자에 이번 총선에서 법조인 당선인이 61명으로 역대 최다이며 20명 이상의 법조인 출신 3선 이상 중진 의원들이 포진하게 되면서 국회에서 법조인 출신들에 갖는 기대는 더 커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의 기이한 행동양식에 국민들이 표로써 보여준 반응을 보라. 법조인들의 정계 진출이나 정치활동 방식을 꼭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왜 그럴까.
우리의 법학 교육 과정과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의 준비 과정은 어떤 문제에 대해 이미 정해져 있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집착적 사고와 오답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게 되어 있다. 법학에서의 정답은 대립하는 정책적 고려사항 중 어느 하나에 우위를 준 것뿐이며 수학적 정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인스타 팔로워 한 개의 답만이 점수를 얻는다. 이러다 보니 법조인들은 한 번 정답이란 것을 찾으면 여간해선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험들은 책상 앞에 진득이 앉아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가 요구하는 바다. 그리하여 법조인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것이 우월감과 독선의 원천이 되어 멍청한 수재가 되고 순혈주의에 빠진다.
판사나 검사 경력의 초기에 정계로 진출한 사람들은 좀 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10년 이상 공직에 있던 법조인은 이런 특성이 몸에 배어 있을 게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는 능력이 떨어진다. 늘 ‘잘하십니다. 옳습니다’라는 말을 듣다 보면 어지간히 자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말을 믿게 된다. 수사나 재판을 받는 사람들의 위축된 모습을 보면서 직무상 권한을 자기 개인의 힘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우월감에 젖어 있고 바쁜 업무에 쫓기다 보니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기회가 없는 것도 이런 인격적 황폐에 한몫할 것이다. 또 법조인은 지는 걸 싫어하는데, 이 호승심이 때로 불협화음이나 충돌을 일으킨다. 불행히도 이들에게는 교정받을 기회가 없다. ‘너 잘못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들이 벼락치기로 정치에 인스타 팔로워 나설 때 벌어질 광경이 어떠할 것인가.
한편 수사나 재판은 성격상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후적 판단 작업이다. 법률사무 자체가 본래부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이는 개별 사안에서의 미시적 이해 조정일 뿐이며, 거시적 관점에서 총체적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런데 법조인들은 사회의 어느 분야나 이슈에 대한 수사나 재판을 하고 나면 자신이 그쪽의 업무나 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판사나 검사가 사건을 처리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벌어지는 병리적 현상에 눈뜨고 비리의 메커니즘에 대해 일정 수준 알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의 어느 분야든 그곳엔 지적·물적 인프라가 있게 마련이고 이에 대한 정통한 지식체계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수사나 재판을 통해 여기에 접해 보고 나면 자신이 대단한 경험과 지식을 쌓은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아마추어가 프로 행세를 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법조인 공직자는 소통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법률사무는 정답을 찾는 일이다. 소신을 중요시하고 타협에 부정적이다. ‘대쪽 같은 판사’나 ‘수사에 타협을 모르는 검사’가 칭송의 대상이 된다. 재판의 독립은 헌법상 통치원리를 넘어 아예 수신칙이며 수사권 독립은 직을 걸고 부르짖는 명제니 어쩌랴.
법조인의 이런 특성 중 대다수는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 정치는 우선 창조적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진보 정권의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보수 정권의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수립했던 것, 이것이 정치다.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희생된 참사를 두고 법적 문제가 없다면서 아무런 정무적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타협과 조정이 필요한 문제에서 덜컥 고소장부터 제출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의 모습처럼 딱한 게 없음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워 항변하고, 자기들끼리의 좁은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하다가 인사 실패를 일으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정치에 나서려면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청산을 논하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통합을 이루는 데에 노력할 일이다. 정치와 사법은 다르다. 그걸 모르더라도 최소한 저 사람이 판사나 검사였을 때 어떻게 재판하고 어떻게 수사했을까라는 비아냥은 듣지 않아야 한다. 그건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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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건의 판결 읽기
우리의 법학 교육 과정과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의 준비 과정은 어떤 문제에 대해 이미 정해져 있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집착적 사고와 오답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게 되어 있다. 법학에서의 정답은 대립하는 정책적 고려사항 중 어느 하나에 우위를 준 것뿐이며 수학적 정밀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인스타 팔로워 한 개의 답만이 점수를 얻는다. 이러다 보니 법조인들은 한 번 정답이란 것을 찾으면 여간해선 자기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시험들은 책상 앞에 진득이 앉아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의 학력주의가 요구하는 바다. 그리하여 법조인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것이 우월감과 독선의 원천이 되어 멍청한 수재가 되고 순혈주의에 빠진다.
판사나 검사 경력의 초기에 정계로 진출한 사람들은 좀 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10년 이상 공직에 있던 법조인은 이런 특성이 몸에 배어 있을 게다. 그러다 보니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는 능력이 떨어진다. 늘 ‘잘하십니다. 옳습니다’라는 말을 듣다 보면 어지간히 자신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한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말을 믿게 된다. 수사나 재판을 받는 사람들의 위축된 모습을 보면서 직무상 권한을 자기 개인의 힘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우월감에 젖어 있고 바쁜 업무에 쫓기다 보니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기회가 없는 것도 이런 인격적 황폐에 한몫할 것이다. 또 법조인은 지는 걸 싫어하는데, 이 호승심이 때로 불협화음이나 충돌을 일으킨다. 불행히도 이들에게는 교정받을 기회가 없다. ‘너 잘못한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들이 벼락치기로 정치에 인스타 팔로워 나설 때 벌어질 광경이 어떠할 것인가.
한편 수사나 재판은 성격상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후적 판단 작업이다. 법률사무 자체가 본래부터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이는 개별 사안에서의 미시적 이해 조정일 뿐이며, 거시적 관점에서 총체적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런데 법조인들은 사회의 어느 분야나 이슈에 대한 수사나 재판을 하고 나면 자신이 그쪽의 업무나 사정에 정통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판사나 검사가 사건을 처리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벌어지는 병리적 현상에 눈뜨고 비리의 메커니즘에 대해 일정 수준 알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의 어느 분야든 그곳엔 지적·물적 인프라가 있게 마련이고 이에 대한 정통한 지식체계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수사나 재판을 통해 여기에 접해 보고 나면 자신이 대단한 경험과 지식을 쌓은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아마추어가 프로 행세를 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법조인 공직자는 소통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법률사무는 정답을 찾는 일이다. 소신을 중요시하고 타협에 부정적이다. ‘대쪽 같은 판사’나 ‘수사에 타협을 모르는 검사’가 칭송의 대상이 된다. 재판의 독립은 헌법상 통치원리를 넘어 아예 수신칙이며 수사권 독립은 직을 걸고 부르짖는 명제니 어쩌랴.
법조인의 이런 특성 중 대다수는 정치에 적합하지 않다. 정치는 우선 창조적 사고와 발상의 전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진보 정권의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보수 정권의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정책을 수립했던 것, 이것이 정치다.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희생된 참사를 두고 법적 문제가 없다면서 아무런 정무적 책임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타협과 조정이 필요한 문제에서 덜컥 고소장부터 제출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의 모습처럼 딱한 게 없음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 책임을 묻는 자리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내세워 항변하고, 자기들끼리의 좁은 인적 네트워크에 의존하다가 인사 실패를 일으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정치에 나서려면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청산을 논하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통합을 이루는 데에 노력할 일이다. 정치와 사법은 다르다. 그걸 모르더라도 최소한 저 사람이 판사나 검사였을 때 어떻게 재판하고 어떻게 수사했을까라는 비아냥은 듣지 않아야 한다. 그건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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